약력
손자는 이름은 무務이고, 자字는 장경長卿이며, 춘추시대 말엽(노자, 공자와 같은 시대) 제齊나라 낙안樂安(지금의 산동성 혜민현惠民縣) 사람으로, 제나라에서도 명망 높은 귀족 세가世家였던 전씨田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와 조부는 모두 용병 전쟁에 뛰어났는데, 특히 조부 전서田書는 병법에 정통하여 크게 전공戰功을 세워 경공景公으로부터 제후에 봉해지면서 성姓까지 하사받고 ‘손씨’로 개성改姓하였다.
손자의 부친 손빙孫凭은 제나라 경대부卿大夫를 지냈다. 하지만 손무, 즉 손자 때에 이르러 귀족들의 권력투쟁이 극한으로 치닫자, 그는 가족들과 함께 오吳나라로 망명해 은거하면서 병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 손자는 오나라 중신重臣 오자서伍子胥와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아무튼 손자의 이 같은 집안 배경과 인생 경력은, 그가 군사 사상가 내지 병법 이론가가 되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자서는 본디 초楚나라 대신大臣이었으나, 아버지와 형이 모두 초 평왕平王에게 살해되는 화를 당하면서 오나라로 망명하였고,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기를 다짐하였다. 그 후 오나라 공자公子 광光이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오왕吳王 합려闔閭이다. 오자서는 천하 패권을 노리는 합려에게 손자를 천거하였고, 손자는 합려를 처음 알현하면서 자신이 저술한 『병법』 13편篇을 바쳤다.
합려는 대단히 흡족해하며, 손자를 상장군上將軍에 임명하는가 하면, 군사軍師에 봉하며 중용重用하였다. 그리하여 손자는 오자서와 함께 합려를 보좌해 정치 개혁과 국력 증강에 박차를 가해 남방의 대국 초나라 정벌에 나섰고, 수차에 걸친 교전 끝에 마침내 초나라 국도國都 영성郢城을 점령하였다. 이후 초나라는 쇠미의 길로 들어섰고, 반면 오나라는 천하에 위세를 떨치며 남방의 강국이 되었으며, 나아가 북방의 제나라, 진晉나라까지 위협하였다. 그 일련의 과정에 손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그 이후 손자의 행적은 사서史書에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는데, 아마도 더 이상 벼슬하지 않고 산중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자적自適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