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흔히 몽테스키외로 알려진 샤를 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는 1689년 1월 18일, 프랑스 귀족 출신 아버지와 영국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1700년,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는 오라토리오 수도원 학교에 들어간 그는 보르도에서 법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로 일하다 1714년 보르도 고등법원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1715년 부유한 신교도 여성과 결혼했으며, 다음 해 백부가 사망하자 백부의 관직과 유산을 물려받았다. 스물일곱 살에 고위 법관이 되고 그에 걸맞은 재산을 갖게 된 것이다. 1716년, 보르도 학술원 회원이 된 몽테스키외는 이미 회고록을 집필하는가 하면 법과 역사, 정치, 물리학, 자연과학 등에 관한 다양한 주제로 논문을 썼다.
1721년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펴낸 뒤로 유명 작가가 되었는데 이 짧은 서한 소설에서 몽테스키외는 하렘에서 허구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파리의 풍속을 묘사하고 루이 14세 치하의 정치와 종교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때 ‘전제주의’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몽테스키외는 계속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의무론》을 쓰기 시작한다. 1728년(39세) 오랜 유럽 여행을 시작해,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각 도시의 풍습과 제도뿐만 아니라 자연현상에도 관심을 보였다. 1745년 《실라와 외크라트의 대화》를 출판한 후, 1749년에는 다시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대작 《법의 정신》을 세상에 선보였는데 이때 예순 살이던 그는 과로로 거의 실명 상태였다.
《법의 정신》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프랑스에서 판매 금지되었다. 2년 뒤, 《‘법의 정신’을 옹호함》(1750년)이 출판되는 등 친구들이 애썼는데도 이 명저는 로마에서도 판금되고 말았다. 그러나 몽테스키외는 《로마인의 위대함과 퇴폐 원인에 관한 고찰》과 《페르시아인의 편지》 재판을 찍고,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를 위해 일했으며, 《취향론》을 쓰기 시작하는 등 열정을 거두지 않았으며, 1755년 1월 20일 파리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