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화이의 이야기
저자 정아은 지음
장르 한국문학
ISBN 9788931022360
발행일 2021-10-29 (초판)
제본 형태 / 판형 소프트 커버 / 규격외
페이지수 412
정가 15,000원
 
★★★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 정아은 신작 장편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독립적이면서도 연결된 독특한 소설 실험, 그 두 번째 이야기


“어쩌면 사랑이란, 각자가 가진 콤플렉스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교묘한 작용이 아닐까?”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 정아은이 《모던하트》 《잠실동 사람들》 《맨얼굴의 사랑》에 이어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소설을 냈다. 전작들에서 헤드헌터, 교육을 좇는 학부모, 드라마 작가 지망생, 성형외과 의사 등 우리네 현실에 밀접한 인물들을 꼼꼼하게 그려내 ‘도시 세태의 관찰자’라 불린 작가가, 이번에는 ‘젠더’를 주제로 특유의 관찰자적이면서도 몰입도 높은 서사를 풀어놓는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은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연결된 독특한 형식의 소설로, 전자는 문학평론가이자 정치평론가인 김지성의 입장에서, 후자는 남편과 딸 둘을 둔 주부 이화이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지성과 화이는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보고 각자 자기만의 서사를 펼쳐나가는데, 두 남녀는 상대가 주인공인 소설에 다시 ‘조연’으로 등장해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데 역할을 한다.

두 소설은 그 형식이 남성과 여성, 즉 ‘젠더’를 주제로 한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한국 문학에서 흔치 않은 흥미로운 시도를 완성해낸다. 젠더라는 주제를 미투, 여성의 몸, 성적 주체성, 모성, 인터섹스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해 서사에 녹여내면서, 소설적 재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독자는 두 소설 중 한 권만 읽어도 좋고, 두 권을 함께 읽어도 좋다. 다만 두 권을 모두 읽을 경우, 작가와 편집자는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를 먼저,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을 나중에 읽기를 권한다.


저 난데없는 적의 앞에서,
내 몸은 받아 마땅한 존중을 받으리라
한 여성, 두 개의 정체성, 그리고 드러나는 사실들


“그녀는 이것이 인생에서 맞는 드문 축제의 순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그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뚜렷이 예감할 수 있었다.”

남편과 아이 둘을 두고 집을 나갔던 화이가 43일 만에 돌아온다. 모르는 남자의 집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살았던 43일 동안, 그녀는 ‘인간고양이’가 되어 체험했던 일들을 소설로 쓴다. 나는 무얼 원할 수 있는가? 무얼 원해도 되는가? 이제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게 된 화이는, 같은 목적을 가진 주석희와 함께 모종의 탈출을 계획한다. 이화이와 최승현, 주석희와 권형욱, 서로 닮은 듯 다른 두 쌍의 부부. 화이와 주석희는 ‘아내’ 역할이 아닌 다른 모습의 서로를 알아가지만, 그럴수록 화이는 주저하게 된다. 분노와 책략 외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이 사람, 주석희 같은 사람과 함께 일을 도모해도 될까? 과연 나는 지금, 여기,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남자 선배 중 한 명은 화이의 얼굴에 ‘색기’가 있다고 표현했다. 눈, 코, 입, 모두 밋밋한데 넌 참 이상하게 끄는 데가 있어. (…) 막연히 직감해왔던 모호한 요소에 언어가 생기면서 비로소 자아의 한 부분이 또렷하게 부각되던 순간. 은밀한 말이 불쑥 내면으로 들어와 죄책감과 불길함, 불안함을 만들어냈고, 그 이후 화이는 그 느낌과 평생 사투를 벌였다.” _103쪽

‘여성’ ‘아내’ ‘엄마’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찾아 떠나는 서사는 많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그것을 추동하는 제1 동력은 ‘몸’에 대한 자각이다.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된 채 살아온 화이는, 단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남편 최승현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생겨난 콤플렉스와 트라우마 때문에 내린 선택이었으니까.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고, 부양할 노모가 있는 마흔의 여성 화이가,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은 무엇일까? 소설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은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다이내믹하면서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남성들의 시선에 시달리면서도 “피부가 탄탄하고” “군살 없는 몸”을 보면 질투심에 빠져드는 화이, 사랑에 빠질 때는 한없이 순박하고 유치한 최승현의 폭력성, 권력욕과 함께 그만큼의 전략을 갖추고 최승현의 사업을 조종하는 권형욱, 우아하고 세련된 외모 뒤로 돈과 복수에 대한 욕망으로 살아가는 여자 주석희. 작가는 이 “어리석고 비열하고 위선적인 주인공들을 각각 한 명의 인간으로 연민하며 보아”주길 바란다. 어쩌면 독자는 이 인물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르나, 어느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경계선이 불분명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
※ 작가와 편집자의 인터뷰


1. 하나의 이야기를 두 사람의 입장에서 각각 전개하는 굉장히 독특한 소설을 기획하셨는데요. 이런 형식의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앉은 자리에 따라 각기 다른 지점을 보게 되는 현상에 언제나 흥미를 느꼈습니다. 《잠실동 사람들》을 쓴 뒤에 소설 속 인물들을 두 명씩 짝지어 본격적으로 차이를 드러내고 싶다는 열망을 한동안 품었는데요. 이번 소설도 그런 유의 열망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한 세상을 할애해서 본격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다는 열망. 차이와 다름은 사람들 간 갈등의 원인이기도 하면서, 강렬한 매혹의 동인이기도 하지요.

2. 작가님도 처음 시도해보는 소설 형식이라 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작들과 비교해 집필할 때 어떤 점이 달랐나요?

동일 사건을 각각 다른 인물에 이입해서 그려야 하기에 품이 많이 들었습니다. 지성의 이야기에서 한 줄을 고치면 화이의 이야기에서 몇 개 문단을 통째로 바꿔야 하고, 그렇게 바꾼 여파로 다시 지성의 이야기를 바꿔 써야 하고. 이 과정이 계속 순환하는 거죠. 초고를 마친 뒤 다듬으며 다시 쓰는 과정이 예전에 썼던 소설들보다 더 오래 걸리고 복잡했습니다.

3.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를 읽으며, 반전에 반전에 반전이 이어져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소설의 주인공 ‘김지성’이 ‘나쁜’ 사람 같았다가 ‘좋은’ 사람 같기도 하고, 좋은 사람 같았다가 나쁜 사람 같기도 하고… 지성의 캐릭터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영화나 문학작품 속에선 선인과 악인이 뚜렷하게 나뉘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의 삶에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나누는 경계선이 사실 불분명하죠. 선해 보이는 사람에게서 의외의 순간에 악한 지점을 발견하고, 악해 보이는 사람에게서 우연히 선량함을 발견하는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반복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선과 악을 품고 있기 마련인데요. 지성은 현실 속 우리 모두가 그렇듯 선과 악을 동시에 품고 있는 다면적인 인간입니다. 다만 ‘지식인’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기에 그 다면성이 더 교묘하게 굴절되어 드러날 따름이죠.

4.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에는 흥미로운 캐릭터가 여럿 등장하는데요, 특히 아름답고 자유로운 시인 ‘이민주’가 기억에 남습니다. 지성은 자신에 대한 민주의 사랑을 부인하는데요, 한편으론 ‘이번만큼은’ 민주의 사랑이 진실이기를 기도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사랑이었을까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배타적인 이성 간의 사랑은 최고의 덕목이자 이상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며 일생을 함께한다는 목가적이고 깔끔한 이야기. 하지만 우리네 인생을 들여다보면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사랑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정의할 수 없고, 한결같지 않고,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감정에 기반한 사랑. 우리네 현실에선 예외적인 사랑이 더 다수라는 말이죠. 민주와 지성의 관계엔 그런 현실성을 반영하고 싶었습니다.

5.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에 등장해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에서 그 정체가 밝혀지는 ‘인간고양이’나,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에서 주인공의 반려묘 등, 두 소설에서 ‘고양이’ 캐릭터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왜 하필 ‘고양이’일까요?

예전에 취재를 위해 어떤 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집에 흰 털이 북슬북슬한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보통 고양이보다 조금 큰 편이었고, 털이 탐스러운 멋진 외관을 갖고 있었죠. 제가 다가가면 바람처럼 빠르게 도망쳐 자취를 감추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집의 주인을 인터뷰하고 있는 동안 고양이가 현관으로 가서 제 신발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동안 냄새를 맡더라고요. 누군가가 제 신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게 어쩐지 미안해서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인터뷰에 몰입해서 고양이의 존재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한참 인터뷰가 진행되던 도중 갑자기 고양이가 불쑥 탁자 위로 올라오더니 드러난 제 팔뚝에 제 몸을 스윽 비비고 지나가는 거예요. 그 후로 한 2분 정도? 고양이는 왔다갔다하며 계속 털로 제 몸 이곳저곳을 감각했습니다. 저는 무슨, 신을 영접한 듯, 황홀하게 그 흰 털 생명체가 만져주는 순간이 지속되길 기도했는데요. 그때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상대의 사정엔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생명체, 호기심을 느끼면 주저 없이 다가와 몸으로 감각해보는 생명체, 그런 생명체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는 그 순간이, 굉장히 강렬했어요.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매혹적인 순간이었지요. 그 뒤로 종종 생각했습니다. 감각으로 만나는 그런 관계가 인간들 사이에도 가능할까. 인간 내부에서 감각과 지성은 서로 반대편에 있을까. 둘 사이에 교집합은 없을까. 혹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는 건 아닐까.

6. 《어느 날 몸 밖으로 나간 여자는》은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에 비해 주인공의 변화가 더 뚜렷이 드러나는, 어떻게 보면 ‘성장소설’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주인공 ‘화이’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성은 일생 타인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정언명령 하에 놓이면서도 정작 제 욕망을 드러내는 데는 제약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최근 자본의 영역이 인간의 신체라는 영역까지 침투해 들어오면서 ‘성’에 관한 모든 금기가 무너지고 여성들이 성적으로 해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서 이미지로만 보이는, 그렇기에 실생활에서는 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일종의 착시현상이죠.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인류가 이뤄온 문명들에서 ‘남성은 타고나길 넘치는 성욕을 주체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고 늘 주장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성은 어떤가요. 여성은 성욕이 있는 존재일까요, 없는 존재일까요? 이런 모순과 오해가 가장 많이 중첩된 분야가 ‘모성’과 엮인 분야입니다. 누군가의 엄마가 된 여성이 제 몸을 제 의지에 맞추어 운용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성관계는 물론이고 차림새, 체중, 흰머리 염색, 피부관리까지, 유자녀 여성은 전방위적으로 사람들의 훈수 대상이 됩니다. 화이는 사회로부터 몸에 대한 다양한 지침을 받고, 별 생각 없이 지침에 따르며 살아온 유자녀 여성의 전형이지요. 소설 속에서 화이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기보다는 자신이 뭘 원할 수 있는지, 혹은 원해도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7. 어떤 면에서 ‘사랑’은 개인적인 영역이지만, 이 두 소설에서 사랑은 그것을 넘어 어떤 ‘정치적인’ 영역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 그리고 그것과 뗄 수 없는 ‘몸’이라는 실체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쓰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이윤 폭을 유지하는 패턴을 더는 지속할 수 없게 되면서, 자본주의는 기존에 자본의 장막 바깥에 놓였던 영역으로 급속하게 침투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교육이나 의료, 전기나 가스 같은 사회의 공공재, 그리고 인간의 신체처럼 열외였던 분야 모두에 손을 뻗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본이 변화를 모색하는 도중에, 오랫동안 이등 시민으로 살아온 여성이 급격하게 깨어나면서 페미니즘이 도래했습니다. 자본, 인간의 몸, 페미니즘이 각각 다른 소망을 품고 급속하게 엮여 들어가게 된 건데요. 개인의 삶에 침투해 들어오는 이 새로운 조류에 사람들은 각자 다른 사고와 배경지식, 한계를 갖고 대응합니다. 그에 비례해서 과도하거나 부족한 정치 행위가 발생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정동이 따라붙지요. 각각 다른 성별과 다른 성장환경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두 개별 인물이 이런 사회의 물결을 타고 어떤 단면을 내보이는지를 특정한 상황을 설정해 제한적으로 그려 보이고 싶었습니다.

8. 책을 읽으며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었습니다. 이전 소설 《잠실동 사람들》이 드라마 판권 계약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요. 이번 소설도 영화화 혹은 드라마화된다면, ‘지성’과 ‘화이’ 역할로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가 있으실까요?

아, 이런 상상은 언제나 즐겁죠.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지만 뭐, 상상은 누구나 해도 되는 일이니까 한번 해볼까요.^^ 지성은 좀 마르고 날카롭게 생긴 남자배우, 이를테면 조인성이나 김남길 같은 배우가 떠오르고, 화이 역할은 박보영 같은 배우가 불쑥 떠오르네요.

9. 끝으로, 이번 소설에서는 ‘작가의 말’을 쓰지 않기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짧게나마 남겨주신다면?

지성 편을 초고 상태에서 미리 읽어주셨던 한 작가분이 “김지성을 한 명의 인간으로 봐주려 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감상을 말씀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독자분들께 그 말씀을 그대로 드리고 싶어요. 부디 어리석고 비열하고 위선적인 주인공들을 각각 한 명의 인간으로 연민하며 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부
2부
 
 
사랑.
그것이구나!
남편이 사랑에 빠졌다. 이렇게 생각하자 화이의 입가에 부드러운 곡선이 생겨났다.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오장육부에 쌓인 노폐물을 걷어가주는 것 같았다. 그 표정, 그 웃음, 그 몸짓. 그래. 그건 사랑에 빠진 인간에게서만 나오는 것이었다. 화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제야 집에 돌아온 이후 남편이 했던 이상한 언행과 너그러운 말투, 자신에 대한 집착의 크기가 줄어든 듯한 기묘한 기류가 이해되었다.
진정한 사랑이기를.
_46~47쪽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행하고, 그 행위가 제가 아닌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로 인해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하게 되는 경험. 그것은 ‘사건’이었다. 화이는 자신의 인생을 구성해온 큼직한 요소들이, 그동안 지켜내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깨달았다. 세상에 바꿀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뭐든지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을 지금, 권 상무와 회의실에 마주 앉아 있는 이 순간에 다시금 인식하고 전율하고 있다.
_91쪽

언제나. 언제나 이번만은 진심이기를 바랐다. 당장이라도 만나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눈빛으로 다가오는 상대가 자신의 거죽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무엇, 영혼이나 정신 같은, 그런 종류의 덩어리에 끌려서 다가오는 것이기를.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떠나갈 그런 얄팍한 호감이 아닌 깊고 진한 감정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이기를. 그러나 그들은 모두 똑같은 것을 바라고, 똑같이 화를 냈으며, 똑같이 떠나갔다. 누구에게서도 진심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 누구에게서도 평생을 거는 진중한 마음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 그것이 2차 성징 이후 화이의 마음에 새겨진 트라우마였다.
_104쪽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타인의 몸. 다른 생각을 할 필요도, 가능성도 없었던 나날. 타인의 몸과 교합하며 쾌감을 느낀다는 게 무엇인지, 그녀는 그를 통해 비로소 알았다. 화이는 물줄기를 맞는 얼굴을 양손으로 세차게 문질렀다. 어푸어푸 소리를 내면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억의 도래를 감내했다. 그 순간들. 그 감각들. 이전에는 없었던 것처럼 갑자기 존재를 드러내던 몸. 그 몸을 인식하던 찰나의 경이로움.
_194쪽

“119 불러줘.”
축 늘어진 채 이리저리 흔들리던 주석희가 이렇게 말했을 때에야, 화이는 긴장이 풀어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살아 있다! 죽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요. 병원에 데려다줄게요.”
“빨리 전화해. 119.”
화이가 블라우스 소매로 주석희의 입가를 닦으며 119를 불렀다. 주석희는 까끌한 천이 얼굴에 닿자 인상을 쓰며 비명을 질렀다. 그 바람에 피가 얼굴의 다른 쪽으로 흘러 깨끗했던 쪽 볼에 붉은 사선을 남겼다.
_276쪽
 
 
정아은
2013년 제18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모던하트》, 《잠실동 사람들》, 《맨얼굴의 사랑》,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공저 《젠더 감수성을 기르는 교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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